"첫눈 오는 날 연락하자."
둘은 흔히 추측하는 남과 여가 아니다. 한 사람은 단 한 권의 수필집을 내놓고 더욱 잘 할 수 있는 시문학으로 돌아선 금아 피천득 선생이고, 다른 한 사람은 선생보다 어린(어리지만 지금 80대이다) 월간 샘터의 창간자 김재순 선생이다.
<대화>(샘터사. 2004)에 나오는 이야기다. 책에 실린 내용은 월간 <샘터> 지령 400호 기념으로 지난 2003년 4월 이뤄진 피천득, 김재순, 법정, 최인호의 대담을 채록한 것이다.
책에 따르면 피천득과 김재순, 그 둘이 맺은 인연은 강산이 세 번도 더 바뀐 세월의 때가 묻은 빛 좋은 상감청자 하나를 보듯 편안하다. 둘이 나눈 대화는 질그릇처럼 투박하면서도 정겹다.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이 인생에서 가장 좋은 친구라는 금아의 말마따나, 그 둘의 우정은 금아 선생에게 우암(김재순씨의 아호)이 일본 출장에서 <시인을 위한 물리학>이란 책 한 권을 선물하면서 두터워지게 된다. 이 후 그 둘은 첫눈이 오는 날 연락하자고 한 그 약속을 지금껏 지키고 있다.
금아의 따님 서영씨가 물리학을 전공하는데, 금아는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보다 딸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기에 딸이 좋아하는 공부를 이해하고 싶었고, 그 마음을 우암이 읽고 있었던 것이다. 책에는 서영씨에 대한 금아의 각별한 애정이 서영씨의 이화여고 입학 조건에서도 드러난다. 옆에 두고 직접 시간을 할애해 딸아이를 가르치려던 아버지의 마음, 마음만이 아니다. 그 정성.... 요즈음처럼 학교가 무너지고 있을 때, 홈스쿨링이 번져나가고 있는 세태에 비추어 뭔가 시사하고 있는 듯 느껴진다.
금아는 베토벤 교향곡을 통해 신이 존재함을 믿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다. 베토벤 교향곡의 각별한 아름다움은 인간의 힘으로만 창조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래 그는 자신의 시 `이 순간`에서도 친구들과 함께 베토벤 교향곡 9번을 들을 수 있는 그 순간의 기쁨을 노래했다 한다.
그리고 금아와 우암은 베토벤이 겪었을 고뇌와 절망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 20대 후반에 청력을 상실하고도 작곡을 계속해서 결국 신의 빚어낸 최상의 음악을 만들어 낸 베토벤, 결국 그 둘은 인간에게는 고뇌와 절망이 삶을 더 심도 있게 단련시킨다는 합의에 이르는데.....
이 때 문득 우암 선생이 베토벤 교향곡의 `환희의 송가`에 담긴 쉴러의 시를 언급하다 금아 선생의 시 이야기를 꺼내면서 한국의 명시인인 황진이 이야기로 넘어가게 된다. 이야기는 시대를 거슬러 올라 한 새벽의 시간을 떼어내어 이불 속에 감추어 두었던 명기 황진이에서 금아 선생의 책상에 올려둔 사진 속 여인, 잉그리드 버그만의 아름다움으로 옮아간다.
연애든 일이든 무언가에 열중해 있는 아름다운 여인으로 그 둘은 잉그리드 버그먼을 꼽았다. 그리고 금아의 첫사랑, 훗날 춘원 이광수 선생의 `흙`속의 여주인공의 이름으로도 쓰인 유순씨와의 첫사랑 이야기가 소개된다.
금아는 영문학자로서의 자신의 삶을 사랑한다. 아흔이 넘어선 금아는 자신의 삶을 윈스턴 처칠의 말을 인용하므로서 그 만족, 더 없는 기쁜 충만을 감사하고 있다.
"윈스턴 처질도 90회 생일에 기자들에게 다음 같이 말을 했다고 하네요. 나를 낳아주신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시 나를 낳아주시고, 내가 살아온 인생 꼭 그대로 조금도 가감 없이 살고 싶다고. 그러자 기자 한 명이 지금 물고 있는 시가도 계속 피우겠느냐 묻더래요. 그래, 아 물런이지. 하며 에피소드를 말해주었대요. 전쟁 중 소대가 퇴각하던 중 막사를 비우고 급히 떠나게 되었는데, 문득 참호 속에 두고 온 시가 생각에 소대를 먼저 보내고 다시 막사로 가서 시가를 주어오는 동안, 그사이 먼저 나선 소대원들이 모두 죽었다는 겁니다."
삶은 우연처럼 느껴지지만,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는 것 또한 믿는 금아는 초신성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삶은 우주처럼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담고 있는 것 아니겠느냐 덧붙인다.
우암이 이야기를 잇는다. 친구와의 우정을 두고 `영혼의 교감이 이루어진 사이`로 정의내리고 싶다 한다. 기실 친구란 사람은 많지만, 떨어지면 그립고 꿈에도 보이는 친구는 얼마 없음을 고백한다. 영혼을 교감할 수 있는 참다운 친구는 연령과도 상관없는 게 아니냐는 말씀이다. 이에 금아가 화답을 한다. 친구야 말로 자신의 일부분이니, 이제 나이가 들어 친구들이 저 세상으로 하나 둘씩 떠나 당신의 일부를 잃는 쓸쓸함에 젓는다고 한다.
하지만, 두 분 모두 늙음에 대한 쓸쓸함은 행복한 기억들과 좋은 인연들이 많아진 것으로 벌충이 되는 것이고, 젊은 날의 방황과 욕망, 분노와 초조가 가라앉고 마음이 안정되어 인생을 관조할 여유가 있으니 늙음에도 장점이 있음을 찬양한다.
두 사람의 대화는 응당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로도 이어져, 사람의 생애를 판단할 때 그 최후의 모습의 중요성을 언급한다. 그러면서 로마의 시인 키케로를 인용한다. "철학을 공부한다는 것, 그것은 곧 죽음을 배우는 일이다.`라는 것. 개체의 생명은 죽어 없어져도 유전자는 자손 대대로 이어지는 것이기에, 죽음이란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존재고 삶의 필연적 귀결이라는 것이다. 만년의 아인슈타인은 죽음에 대해 "더 이상 모차르트를 들을 수 없는 것`이라고 간결하게 정의했다고 한다.
두 사람이 나눈 우정, 삶과 진실이 담긴 대화를 보면서 나도 누군가 진솔한 대화, 영혼의 밑바닥까지 보여줄 수 있는 대화를 나누고 싶어졌다. 시월의 어느 하루, 오늘 나는 혼자 앉아 침묵하며 일에 파묻혀 있는 동안, 밀어두었던 인생의 숙제 같은 친구와 우정과 대화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뒤이어 작가 최인호 선생과 실상사의 법정 스님이 나눈 종교와 죽음에 대한 대화를 이야기할 차례이다. 하지만,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나도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싶다. 그 누군가가 누가 될는지 아직 떠올리지 못했지만.....
잠시 쉰다는 것이 이틀이 되어 버렸다. 이틀 쉬는 동안 대화를 나누었던가? 사람과 사람의 영혼이 만나 공중 한 지점에서 그들 영혼만의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이 대화라고 할 때, 그 사이 내가 사람을 만나 나눈 것이 진정한 대화인가에 대한 판단은 유보해두기로 한다. 그 유보의 틈을 타서 소설가 최인호 선생과 법정 스님간의 대화를 되짚어 본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촛불을 켜는 산방에 앉아 은은한 빛 속에서 향기로운 차의 향을 음미할 수 있는 여유를 갖는 것, 쉬운 일처럼 느껴져 누구라도 흉내 낼 수 있는 것 같지만, 느림을 몸으로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은 기실 많지가 않다. 느림이 몸에 붙게 하여 몸으로 대상과 혼연의 일체를 맛볼 수 있는 경지는 비움의 미덕을 실천할 수 있는 자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교감한다는 것은 대상을 외부에 존재하도록 관계를 유지해서는 가능하지 않다. 차 한 잔과의 교감을 이루기 위해서는 차 한 잔이 내 입안으로 들어와 식도를 타고 위 속으로 들어오는 과정 전체를 느껴보는 과정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존재의 느낌은 온통 차에 집중해 있어야 한다. 그 움직임에 따라 순간순간의 차의 존재감을 오롯하게 경험해야만 한다. 그러니 이 어찌 쉬운 일일 수 있을까?
엄청난 인내로 자기 자신을 내려두는 작업인 것이다. 마치 이는 최인호 선생이 한 회 한 회 글을 써서 1천 회를 넘기고 2천 회를 넘기는 연재소설을 쓰는 인고의 과정과 닮아있다. 큰 욕심으로 먼 미래를 바라보면 10년 연재물을 쓸 수 없다는 것이 그 분의 입장이다. 소욕지족(少慾知足)의 자세로 작은 일에 만족하는 것이야말로 행복으로 개안을 해주는 삶의 방식인 것이다.
젊은 시절 누군가 보다 더 많이 성취하고 더 많이 소유하는 것에서 행복이 오는 줄 알았다던 최인호 선생도 마음이 가난한 자가 행복하다는 예수의 말씀을 예순 이후에 더욱 간절한 진리로 느끼게 되었다 한다.
이 지점에서 `행복하다`가 상태 형용사인가를 스스로에게 묻는다. 답은 `아니다` 이다. 행복하다는 동사이다. 우리가 몸과 마음과 생각을 담아 움직이는 과정에서 느끼게 되는 감정의 언어적 표현이 `행복하다`이다. 따라서 `행복하다`는 주체적 움직임 없이 발생되지 못한다. `행복하다`는 무척이나 주관적이면서 능동적인 동작 동사이다. 느끼기 위해서 주체가 빠질 수 없는 그러기에 능동태로 존재하는 동작 동사이다.
최인호 선생과 법정 스님은 요즈음 아이들의 사랑을 이야기한다. 소유로 왜곡되어진 사랑의 물화성에 대해 개탄하고 있다. 그러면서 사랑하는 방법으로서 비폭력적 고요 속에 깃든 폭력을 지적한다. 겉으로는 매우 평화롭게 보이는 가정에서 일어나고 있는 비명 없는 폭력들이 더 무서운 이유가 사랑이라는 미명 아래 은폐되어지는 진정성이다. 가끔 세련된 사랑 방식이랍시고 상대가 듣기 좋아하는 말만 해주고, 적당히 타협하고 화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고 사랑한다고 수도 없이 말한다. 하지만 그렇게 세련됨으로 포장된 사랑은 무관심과 두려움의 또 다른 행태일 수 있다.
최인호 선생과 법정 선생은 이처럼 진정한 사랑을 잃어가는 우리 세대에 대해 순수한 사랑, 순결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천진불을 통해 다시금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이가 없는 영혼으로 태어난 우리는 육신을 빌려 이 세상에 태어난 인연들이다. 그 인연들이 만나 사랑을 하고 잠시 머물던 이 세상에서 빌려 입었던 거죽인 육신을 벗어나는 것이 불가의 인연설이라는데, 인생이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아니 자기 자신에게 조차 현대 삶은 자기가 자기이도록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스스로도 속이는 삶 속에서 삶의 진정성을 찾기는 어렵고, 허무로 치닫게 되는 순간순간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이다.
늘 깨어있어야 하는 존재의 숙제는 부단히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통찰하는 자세 없이는 불가능하다. 지식인과 지성인이 다른 점이 바로 자신의 벽을 인지하고 그 벽을 뛰어 넘기 위해 자기의 목소리를 듣는 노력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란 것이다. 지식인에게 결여된 것이 바로 자기 목소리에 대한 인식, 자기 내면의 욕구에 대한 이해란 것이다.
모든 삶은 고립되어 있고 외로운 것이다. 외롭지 않기 위해 사람을 만난다고 해도, 우리 인간은 외로움을 모를 때 무딘 삶을 살게 된다. 법정 스님이 이야기한다. 외로움은 옆구리로 스쳐 지나가는 마른 바람 같은 것이고, 그런 바람을 쏘이면 사람이 맑아진다 한다. 또한 고립자로서 고독을 달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저 고독한 존재로서 자신을 받아들이고, 깨어 있기 위해 자신의 벽에 끊임없이 부딪혀보는 수밖에는....
바람 없는 바람이 있고, 소리 없는 풍경이 있고 길 없는 길도 있다.
길이란 집착한다고 자신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무소의 뿔처럼 홀로 묵묵히 가시밭길도 헤쳐 지나가야하는 것이 인생이다. 인간 존재로 태어난 우리의 천업은 고독을 수용하는 것이다. 인간 존재의 비극성은 바로 이 고독을 떨쳐내지 못하는 순간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바람 없는 바람, 전자와 후자를 소망으로 대체해서 느껴보자. 소망하지 않는 소망... 기실 소리가 있어야 그 쓰임이 분명할진데 소리를 내지 않는 풍경도 있다. 탁 트여 제 존재를 드러내줘야 할 길이 보이질 않는다. 서두르지 말자. 여유 있고, 느리게.
[북데일리 김영욱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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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께서 남기신 글입니다. [2006/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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