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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 께서 남기신 글입니다.  [2004/01/16]
여백의 미학 2003/12/05 13:43

동양화의 기법 중에 홍운탁월(烘雲拓月)이란 것이 있다. 달을 직접 그리지 않고 주변의 구름을 그림으로써 달의 모습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이런 경우 달이 있는 곳에는 아무런 운필(運筆)의 흔적이 없다. 그러나 거기에 달이 없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말하자면 '무(無)'의 실체화'라고나 하겠다. 또한 동양화는 '홍운탁월로서의 여백'이 아닌 '진짜 여백'도 중요시한다. 이런 여백은 무의 실체화가 아니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곳'을 아무것도 칠하지 않은 채 그냥 놔두는 것이다. 이에 비해 서양화는 여백이 별로 없다. 화면 가득히 형형색색의 요소들을 빼곡이 집어넣는다. 심지어 동양화 같으면 진짜 여백으로 남겨둘 부분마저 '하얀색 물감'으로 칠해 넣기도 한다.

동양과 서양의 이런 차이는 수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동양에서는 특히 인도는 예로부터 무의 관념에 아주 익숙했다. 그리하여 수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의 하나인 '0'을 세계 최초로 만들어냈다. 그러나 서양 학문의 원류를 이루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진공은 불가능하다"라고 단언했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0'의 개념이 자발적으로 생겨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나중에 동양에서 전래됐을 때도 상당한 거부반응을 보였다. 후세의 어떤 사람은 이를 가리켜 '진공의 공포'라고 했다. 서양의 이런 전통은 그 뒤에도 이어진다. 파스칼은 <팡세>에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은 나를 전율케 한다"라고 썼다. 광대무변의 무를 명상하며 마음의 평화를 찾은 동양적 사고와는 크게 대조되는 자세다.

하지만 서양의 태도가 과학의 발전에는 유리했다. 동양에서는 무 자체뿐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것들도 무화(無化)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낱낱이 파고들어갔다. 그러한 분석적 자세를 통하여 엄청난 양의 지식을 축적했다. 결과적으로 근대 이후 과학의 주도권은 완전히 서양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그러나 오늘날 전 세계는 하나의 지구촌을 이루었다. 덕분에 과학도 이제는 인류 전체의 공유 재산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 발전도 세계적으로 일체화하여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보편적인 과학의 시대에 살면서도 비과학적인 경향이 드러나는 경우를 자주 본다. 아직도 우리 주변에 떠돌고 있는 수많은 미신과 사이비 과학들이 그것이다. 이들은 아무런 과학적 근거가 없음에도 오히려 그럴듯한 과학의 탈을 쓰고 떠돌아다닌다. 실제로는 "과학적 근거가 없다"는 공백 상황이 그들을 더욱 설치게 한다. 이런 점에서 현대인들은 점점 더 파스칼을 닮아가는 듯하다. 공백으로부터 편안함이 아니라 두려움을 느낀다. 사이비 과학은 이처럼 공백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교묘하게 파고든다. 어떤 때는 터무니없는 줄 뻔히 알면서도 오직 공백의 두려움을 떨치기 위하여 탐닉한다.

현대인의 가장 큰 심리적 특성으로는 '불안'을 꼽는다. 불안 때문에 바쁘게 살고, 빠져들고, 휩쓸리면서 끊임없이 채우려고 든다. 그래서 이제 과학하는 마음과 고유의 미덕을 조화 해갈 필요가 있다. 근래 빠름보다 느림, 복잡성보다 단순성을 찾는 움직임이 조금씩 눈에 띈다. 거기에 여백의 미학을 보는 마음의 눈을 더하면 더욱 좋을 것이다. 빈 채로 있을 곳을 빈 채로 두는 것은 우리 전통에 어울릴 뿐 아니라 과학적으로도 올바른 자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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